통사
울산석유화학공업단지 건설계획
‘석유화학 개발계획’의 수립
석유화학산업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급속도로 발전했다. 이 무렵 미국은 합성섬유·합성수지 등의 석유화학 제품을 잇달아 개발하고, 이를 발판으로 1950년대 이후 세계 석유화학산업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특히 유기화학제품 기초원료의 약 80%를 공급하며 세계시장을 석권했다.
일본도 1955년을 전후한 시기에 석유화학산업 육성에 박차를 가해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석유화학산업국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일본은 석유화학산업의 성장을 바탕으로 경제대국으로 올라서는 데 성공했다. 석유화학산업이 일본 경제의 부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1960년대 중반까지도 석유화학 제품을 자체 생산하지 못하고 수입에 의존하는 실정이었다. 합성수지·합성섬유·합성고무 등 석유화학 관련 산업의 공업화가 추진되면서 그 원료인 석유화학 제품의 수요가 급격히 늘어났지만, 이를 대부분 해외에서 수입해 충당한 것이다. 따라서 산업이 발전할수록 석유화학 제품의 수급불균형 상태는 심화되었다.
이에 정부는 석유화학산업을 직접 육성하기로 했다. 이미 국내 최초로 정유공장(대한석유공사)을 건설하여 가동에 들어간 상태였으므로, 석유화학산업을 일으킨다면 정유공장에서 나오는 원료를 가지고 합성수지와 합성섬유 등을 국산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본 것이다. 이를 통해 석유화학 제품의 수입 대체 효과를 보는 것은 물론, 원유에서 최종 제품에 이르는 다양한 제품을 국산화하겠다는 복안이었다.
정부는 1967년에 시작되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1971)의 핵심사업으로 석유화학산업 육성 정책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1966년 2월 미국의 컨설팅업체인 ADL(Arthur D. Little)사에 의뢰하여 타당성 조사를 실시했다. ADL은 “개발 가능성이 충분하다”며, 다만 국내 수요가 많지 않으므로 연산 3만 톤 규모의 소규모 나프타분해공장을 건설하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ADL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정부는 1966년 11월 연산 6만 톤 규모의 나프타분해공장을 중심으로 하는 ‘석유화학개발계획’을 확정했다. ADL이 추천한 사업을 대부분 수용하되 그 규모를 확대하여 나프타분해공장과 13개 계열공장을 건설한다는 계획을 확정한 것이다.
석유화학산업 육성을 위한 지원책 마련
석유화학산업 도입을 위한 사전 검토를 마친 정부는, 1966년 7월 석유화학산업 개발을 핵심사업으로 하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확정해 발표했다.
석유화학산업을 육성하겠다는 정부의 계획은 경제계뿐만 아니라 국민들로부터도 큰 반향을 불러왔다. 당시만 해도 석유화학은 일부 선진국에서나 볼 수 있는 대단위 사업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석유화학은 10여 개의 공장을 동시에 건설·운영해야 하는 콤비나트(Kombinat) 산업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산업기반이 취약한 당시의 우리나라 형편으로서는 무모하게 보일 수도 있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계획이 원대한 만큼 우려도 컸다. 그 중 하나는 정확한 수요를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석유화학공장에서 만드는 제품은 시중에 판매되는 최종 소비제품이 아니라 관련 산업의 공장에서 원료로 쓰는 중간 소비제품이다. 따라서 공장이 많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그 수요조차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 이미 국내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외국산 제품과 경쟁하려면 품질과 가격 모두에서 그만한 경쟁력을 확보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러한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 정부는 다양한 대책을 마련했다. 먼저, 국내 투자자들이 자본의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석유화학산업에 적극 투자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외자도입법」을 비롯하여 「관세법」, 「조세감면규제법」 등 관계법령을 개정했다. 또 석유화학업체들이 조기에 국제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자 「석유화학공업육성법」도 제정했다.
석유화학산업 육성 계획을 확정한 정부는 석유화학공장이 들어설 공업단지의 입지 선정 작업에 착수했다. 그리고 1967년 12월 11일 울산지구의 가용면적 1,250만㎡(약 380만 평) 중 울산시 부곡동 일대 약 330만㎡(약 100만 평)을 석유화학공업단지 부지로 최종 선정하여 1968년 2월 이를 공식 발표했다. 이로써 울산지구는 우리나라 최초의 석유화학공업단지로 조성되게 되었다.
부지를 확정한 정부는 1968년 11월 본격적인 단지 조성작업에 착수하여 1969년 12월 완료했다. 중요한 것은, 단지 조성을 위한 계획수립과 시공과정 모두가 국내 기술진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지질조사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용역팀이 독자적으로 수행하여 완료했다. 이는 우리나라의 건설기술이 높은 기술력을 확보하며 빠르게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울산석유화학공업단지는 1970년 4월부터 본격적인 단지 분양에 들어갔다.
울산석유화학공업단지 실수요자 선정
울산석유화학공업단지 부지 조성공사에 앞서 정부는 단지에 입주하여 공장을 건설할 실수요자 선정 절차를 시작했다. 그리하여 1967년 7월 15일 한국화성, 삼양사, 천우사, 동해VCM(대한플라스틱, 공영화학, 한국화성, 우풍화학 공동 출자회사), 동양카프로락탐(한국나이론, 한일나이론, 동양나이론 공동 투자회사), 이수화학, 삼양타이어, 국태산업, 대성목재 등을 1차 실수요자로 선정하여 발표했다.
그러나 실수요자로 선정된 업체들 가운데 일부가 석유화학산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은 물론 사업자금이 부족하거나 대규모 공장을 건설한 경험이 없어 문제가 되었다. 석유화학산업은 정부가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추진하는 사업이므로, 참여하기만 하면 성공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고 무작정 뛰어든 기업이 많았던 것이다. 결국 스스로 포기하는 기업이 생겨나면서 1차 실수요자 선정 작업은 그 결과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자금 및 역량 부족 등을 이유로 사업권을 포기하는 기업들이 늘어나자 정부는 실수요자로 선정된 기업들을 대상으로 사업역량을 재점검하여 일부 기업들을 탈락시키고, 실수요자가 없는 분야에서는 역량 있는 기업이나 투자자를 직접 접촉하여 사업에 참여하도록 권고하기로 했다.
한편으로는 민간기업의 자금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감안해 민간기업이 참여할 수 있는 분야도 일부 조정했다. 민간기업은 자금규모가 크지 않은 업종에 참여토록 하고, 나프타분해공장(NCC, Naphtha Cracking Center)과 PE(Polyethylene), VCM(Vinyl Chloride Monomer), AN(Acrylonitrile), 카프로락탐, 유틸리티센터 등 많은 자금이 소요되는 사업들은 국영으로 추진하기로 한 것이다.
그 결과 1970년 5월, 나프타분해공장은 국영기업체인 대한석유공사가 추진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PE·VCM·AN·카프로락탐·석유화학지원공단은 충주비료가, 에탄올·아세트알데히드는 동신화학이, 알킬벤젠은 이수화학이, 합성고무는 삼양타이어가, 메탄올은 대성목재가, 그리고 PP(Polypropylene)는 대한유화가 실수요자로 최종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