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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사

위기극복 위한 생산 · 영업활동 강화
프롤로그 제1장 대한유화공업주식회사 창립 1970 1975 제2장 PP/HDPE 전문기업으로의 비약적 성장 1976 1988 제3장 위기극복 및 지속가능경영 기반 구축 1989 1998 제4장 사업의 다각화와 글로벌화 1999 2009 제5장 ‘종합석유화학회사’를 향한 제2의 도약 2010 2020 에필로그

위기극복 위한 생산·영업활동 강화

  • 온산·울산공장의 생산량 증대

    대한유화가 창사 이래 최대의 시련에 직면하면서 결국 법정관리에까지 들어가게 된 것은 온산 나프타분해공장의 건설이 직접적인 요인이었다. 이 공장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부채를 안게 된 것이 위기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대한유화로서는 억울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정부 정책에 따라 정식으로 선정절차를 거쳐 사업자로 선정됐지만, 곧바로 석유화학산업 투자자유화 조치가 취해지고 대기업들의 무분별한 과잉투자로 시장이 왜곡되는 바람에 고스란히 그 피해를 보았기 때문이다. 시장환경이 어수선할 때 준공된 온산공장은 1991년 10월 3일 상업생산을 시작한 이후에도 한동안 만족할 만한 생산량을 달성하지 못했다. 본격적인 생산을 시작한 1992년의 생산량도 에틸렌 24만 톤, 프로필렌 13만 7,000톤에 머물렀다. 에틸렌 25만 톤, 프로필렌 16만 톤의 설계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생산량이었다.
    하지만 시장상황이 어려운 가운데에도 대한유화는 활발한 영업활동을 펼쳐 새로운 수요처를 개발하고, 꾸준히 운전방법 개선과 Revamping을 실시하여 생산량을 늘려나갔다.
    그 결과, 1995년에는 법정관리의 여파로 에틸렌 생산량이 일시 감소하기도 했지만, 그 이후에는 해를 거듭할수록 생산량이 늘어나 1998년에는 에틸렌 34만 1,000톤, 프로필렌 18만 톤을 생산할 정도가 되었다. 연속가동 기간도 25일에서 120일 이상으로 연장됨으로써 한 차원 높은 안전·안정 운전조건을 확보했다.
    울산공장도 마찬가지였다. 울산공장은 1989년만 해도 PP 24만 4,000톤과 HDPE 14만 8,000톤을 합쳐 39만 2,000톤을 생산했으나, 1998년에는 PP 28만 2,000톤, HDPE 32만 2,000톤을 합쳐 60만 4,000톤을 생산하는 괄목할 만한 신장세를 보였다. 이는 국내외 시장에서 벌어진 과당경쟁 속에서도 생산능력과 생산성을 지속적으로 높여나간 결과였다.

  • 내수·수출 병행 전략 및 안양하치장 개장

    대한유화가 지속적으로 생산량을 늘려나갈 수 있었던 데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전략적인 영업활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한유화는 공급과잉에 대한 우려가 커지기 시작하던 1990년 무렵부터 영업활동을 대폭 강화해 판매망을 넓혀나갔다.
    먼저, 다수의 기업들이 석유화학업종에 진출해 경쟁구도가 복잡해진 점을 감안하여, 대한유화 제품을 다른 회사 제품과 차별화하고 고유의 브랜드가치를 확보한다는 취지에서 상호와 상품명에 대한 상표등록을 추진했다.
    대한유화는 1990년 2월 ‘大韓油化工業株式會社’에 대한 상표등록을 신청하여 1991년 6월 상표등록을 완료한 데 이어, 1996년 6월에는 PP와 HDPE 수지 외 8종의 상품명에 대한 한글 및 영문 상표등록을 출원해 1997년 12월 등록을 완료했다. 이후에도 대한유화는 PP/HDPE 수지 제품과 PE 수지 제품류의 상표등록을 지속으로 추진해 상표 보호체계를 구축했다.
    이와 함께 매출을 확대하기 위해 국내외 시장에서의 판매에 총력을 기울였다. 특히 1992년에는 삼성석유화학과 현대석유화학의 공장이 완공돼 국내시장에서의 경쟁이 매우 치열해지자, 생산량의 일부를 수출로 전환하는 전략을 펼쳐 내수시장에서의 어려움을 타개해 나갔다.
    법정관리 중이던 1994년부터는 세계경제가 점차 회복세를 보임에 따라 동남아시아와 중국시장을 타깃으로 수출을 추진했다. 마침 우루과이 라운드가 타결돼 수입관세가 인하된 가운데 미국·이탈리아 등지에서 잇따른 에틸렌공장 사고가 발생해 국제시장의 공급물량이 부족해지자 수출에 더욱 힘을 쏟았다.
    그 결과 대한유화의 PP/HDPE 제품은 1996년까지 기대 이상의 호황을 누릴 수 있었다. 온산공장도 시간이 지날수록 가동 초기의 부진에서 벗어나 생산량을 늘려가며 울산공장 원료공급기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한편, 대한유화는 1988년 5월 경기도 안양시 평촌동 일대의 9,884㎡(약 3,000평)의 토지를 매입하고, 수도권의 수요업체를 타깃으로 한 ‘안양하치장(荷置場)’을 건설하여 1989년 11월 7일 개장했다.
    안양하치장은 대한유화의 PP/HDPE 제품을 사용하고 있지만 규모가 작아 울산에서 직접 출하·운송할 수 없는 서울·경기 지역의 소규모 가공업체들에게 적기에 제품을 공급하고자 설치한 시설이다. 그로부터 2개월 후인 1990년 1월 1일 안양하치장은 ‘대한유화 안양직매장’으로 재탄생해 수도권 중소업체들을 대상으로 한 소매 영업망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안양하치장 개장식(198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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