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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사

최초의 PP 사업자 대한유화공업(주) 출범
프롤로그 제1장 대한유화공업주식회사 창립 1970 1975 제2장 PP/HDPE 전문기업으로의 비약적 성장 1976 1988 제3장 위기극복 및 지속가능경영 기반 구축 1989 1998 제4장 사업의 다각화와 글로벌화 1999 2009 제5장 ‘종합석유화학회사’를 향한 제2의 도약 2010 2020 에필로그

최초의 PP 사업자 대한유화공업(주) 출범

  • 울산석유화학단지 PP 사업자로 선정

    울산석유화학공업단지의 실수요자를 직접 찾아 나선 정부는 1970년 4월 재계 원로인 이정림 회장에게 PP 사업 참여를 제안했다. PP 공장은 1차 실수요자 선정 당시 국태산업(주)이 사업자로 선정되었으나, 이 회사가 내부적인 이유로 사업 추진을 포기함에 따라 마땅한 사업자를 찾지 못한 상태였다.
    정부의 요청을 받은 이정림 회장은 심사숙고한 끝에 우리나라 석유화학산업의 성공적인 개발에 일조하기로 하고, 동생인 이정호 회장과 함께 석유화학산업에 진출하기로 결심했다. 우리나라 석유화학산업의 1세대로서 대한민국 석유화학산업의 첫 장을 여는 개척자의 역할을 맡기로 한 것이다.
    당시 이정림 회장은 그동안 경영해오던 대한양회를 매각하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모처럼의 휴식기를 보내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정부가 개인 신분인 이정림 회장에게 PP 사업 참여를 제안한 것은 이정림 회장의 경영능력과 기업가정신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이정림 회장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이른바 ‘개성상인 후예’로서, 해방 이후 산업의 기반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여건에서도 뛰어난 경영수완을 발휘하여 재계 3위의 개풍그룹을 일구어낸 인물이었다. 또 대표적인 경제단체인 한국경제인연합회(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의 설립을 주도하고 제2대 회장을 역임하는 등 우리나라 산업경제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울산 석유화학공업단지 건설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 직접 참여하여 정부와 함께 우리나라 미래 석유화학산업의 청사진을 그리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1959년 4월 이정호 회장 등과 함께 ‘3·1문화상’ 및 ‘3·1장학금’ 제도를 제정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 이행에 앞장서는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몸소 실천한 점도 높이 평가했다.
    이 같은 이유에서 상공부는 이정림 회장이 PP 사업을 맡는다면 우리나라 석유화학산업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하고 PP 사업에 참여해 줄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이것이 바로 대한유화 창립의 시작이었다.



  • 대한유화주식회사 창립 및 사명 변경

    상공부의 요청을 받은 이정림 회장은 오랫동안 함께 기업을 경영하며 호흡을 맞춰온 이정호 회장과 구체적인 검토에 들어갔다. 이정림 회장은 정부가 울산석유화학공업단지를 계획하던 초기부터 재계 원로로서 참여한 바 있기 때문에 정부의 석유화학 육성정책에 대해서는 충분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업자로서 공장을 건설하고 운영하기 위해서는 실무적인 검토가 필요했던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업성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최초의 제안내용은 2,800만 달러를 투자하여 연간 2만 톤 규모의 생산능력을 갖춘 PP 공장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업성 검토 결과, 2만 톤 규모로는 경제성이 전혀 없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다만, 투자비를 1,000만 달러로 줄이고 생산능력을 3만 톤 규모로 확대하는 동시에, 국내수요를 충당하고 남은 제품을 해외에 수출하는 조건이라면 사업성이 있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 같은 판단에 따라 이정림 회장은 정부의 제안을 수락했고, 정부는 1970년 5월 이정림 회장을 PP 공장 실수요자로 선정하여 공식 발표했다.
    이정림 회장은 곧바로 사업을 수행할 회사 설립에 착수했다. 먼저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3가 95-1번지(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27-2)에 사무실을 마련했다. 정관에 기재할 사업목적은 ‘석유화학 제품의 제조 및 판매업, 이에 관련하는 일체의 부대사업’으로 결정했다.
    수권자본금은 2,000만 원으로 하되, 우선 액면가 1,000원짜리 주식 1만 주를 발행하여 1,000만 원의 납입자본금으로 회사를 창립하기로 했다. 회사명은 ‘대한유화주식회사’로 정해졌고, 발기인으로는 이정림, 이정호, 강수철, 이준규, 김병철, 이정항, 이정구 등 7인이 참여했다. 발기인 대표는 이정림 회장이 맡았다. 대한유화는 1970년 5월 30일 발기인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정관을 작성하여 회사의 운영체계를 확정했다. 이어 6월 2일에는 총 발행주식 수 1만 주 가운데 9,500주를 인수하고, 잔여주식 500주는 주주모집을 통해 1명으로부터 청약을 받아 인수를 완료했다. 이에 이정림 회장은 한국상업은행 남대문지점에 주금 납입을 완료하고 같은 날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이 날 열린 창립총회에서는 창립사항 보고 및 정관 승인, 이사 및 감사 선임, 본점 설치장소 등의 안건이 처리되었다. 또한 이사에는 이정림, 이정호, 강수철, 김병철 등 4인이 선출되었고, 감사에는 이준규가 선임되었다. 이에 따라 대한유화주식회사가 정식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한편, 창립총회가 열린 지 이틀만인 1970년 6월 4일 대한유화는 주주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임시 주주총회를 열고 상호를 ‘대한유화공업주식회사’로 변경했다. 기존의 상호에 ‘공업’을 추가한 것이다. 이 날 변경된 상호는 2015년 3월 13일 원래의 상호인 ‘대한유화주식회사’로 다시 복원될 때까지 약 45년 동안 사용되었다.

    창업 당시 회사 현판(1970.06.)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에 소재한 당시 본사 전경(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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