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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사

PP 공장 건설계획 수립
프롤로그 제1장 대한유화공업주식회사 창립 1970 1975 제2장 PP/HDPE 전문기업으로의 비약적 성장 1976 1988 제3장 위기극복 및 지속가능경영 기반 구축 1989 1998 제4장 사업의 다각화와 글로벌화 1999 2009 제5장 ‘종합석유화학회사’를 향한 제2의 도약 2010 2020 에필로그

PP 공장 건설계획 수립

  • 입지조건 뛰어난 공장부지 확보

    대한유화는 울산석유화학공업단지 실수요자로 선정됨에 따라 PP 공장 건설 준비에 착수했다. 공장이 들어설 부지는 어느 정도 확정이 된 상태였다. 석유화학지원공단(지금의 (주)한주)이 1970년에 이미 석유화학공업단지로 지정된 울산시 부곡동 일대 약 330만㎡(약 100만 평)의 부지 가운데 70% 정도를 공장건설용지로 정지작업을 해놓은 것이다.
    울산석유화학공업단지는 여러모로 입지조건이 뛰어났다. 먼저, 단지 내 계열공장들이 필요로 하는 용수, 스팀, 전력 등의 유틸리티 전량을 석유화학지원공단이 일괄 공급하는 체계가 갖추어졌다. 이는 대량생산으로 원가를 절감할 수 있는 방식이어서, 대한유화는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필요한 인프라를 공급받을 수 있는 이점을 안게 되었다.
    또 단지 주변에 100여 개 이상의 관련 기업이 산재해 있어 각종 부원료를 구입하거나 제품을 판매하는 데 직·간접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었다. 진입도로, 철도, 항만시설 등이 인접해 있어 물류관리가 편리하고 경부고속도로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제품 수송을 용이하게 하는 유리한 조건이었다. 대한유화는 석유화학공업단지 동편에 위치한 약 27만 6,000㎡(약 8만 3,600평)의 부지를 배정받았다.

  • PP 공장 건설계획의 구체화

    대한유화는 새로 건설할 PP 공장을 연산 3만 톤 규모로 짓기로 했다. 맨 처음 대한유화가 제안 받은 것은 2만 톤 규모였으나 경제성 확보를 위해 이를 확장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 2만 톤은 PP 공장 규모로는 최소의 경제단위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나 PP의 수요 증가에 따라 생산설비를 확장하는 기업이 늘고 있는 시장상황을 감안하면 2만 톤 규모로는 경쟁력을 갖추기가 어렵다는 게 대한유화의 판단이었다. 실제로 1960년대 말 이후 세계 각국에서 건설되는 PP 공장은 대부분 3만 톤 이상의 규모로 지어지는 추세였다.
    대한유화는 고정비를 절감하는 동시에 국제경쟁력을 갖춘다는 취지에서 연산 3만 톤 규모의 공장을 짓기로 했다. 이를 통해 당장의 수요뿐 아니라 향후의 수요증가에 대응한다는 계획이었다. 나아가 장차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경우 증설도 가능하도록 기계시설의 용량을 유연하게 설치하기로 했다. 이 같은 방침에 따라 촉매 조제 및 용제 회수시설, 프로필렌 정제시설, 중합시설, 건조시설, 펠렛타이징(Pelletizing, 제립) 및 포장시설 등 주시설과 부대시설을 구성했다.
    공장 건설에 필요한 자금은 총 50억 845만 원(1,589만 9,860달러)으로 잡았다. 이 중 11억 1,600만 원은 한·일 양측에서 각각 50%씩을 증자에 따른 주식매입자금으로 충당하고, 나머지 38억 9,245만 원은 차관을 도입해 투입하기로 했다. 구체적으로, 대한유화 측에서는 이정림·이정호 회장과 기타 내국인 투자자가 이미 초기 자본금으로 투입한 1,000만 원과 증자 예정분인 5억 4,800만 원을 합쳐 총 5억 5,800만 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또 외국인투자자인 마루베니 및 치소엔지니어링 측에서도 증자 예정분의 주식매입대금으로 5억 5,800만 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대한유화의 자본금은 11억 1,600만 원으로 증가했다.

  • PP 공장 건설부지(1970.)
  • PP 공장 건설 표지판(1971.)
울산석유화학공업단지 배치도(1970.)

BEHIND STORY

원래 울산공장의 자리는 그곳이 아니었다?

1970년 3월까지만 해도 울산석유화학공업단지의 PP 공장 1차 실수요자는 국태산업이었다. 그러나 진행과정 중 각종 난관에 봉착한 PP 공장 프로젝트는 정부의 판단과 선택으로 인해 이 회장 형제에게 넘어왔고, 이는 대한유화 반세기 역사의 출발점으로 기록되었다.
급박하게 전개된 상황 속에서 1971년 PP 공장을 착공하려 했지만 대한유화는 부지배정 과정에서 또 하나의 선택지를 받게 된다. 대한유화가 원래 PP 공장 부지로 배정된 곳은 현재 한국화성공업 자리였고, 현재 대한유화 울산공장 자리는 당시 한국화성공업이 건설하기로 한 LDPE/VCM 공장 부지였다. 두 부지는 울산석유화학공업단지 부지 중 가장 면적이 넓은 곳이기도 했다(PE/VCM 공장 부지 면적 : 약 28만 4,300㎡, PP 공장 부지 면적 : 약 27만 6,000㎡). 그러나 한국화성공업이 시행한 지질조사 결과 그들의 부지는 무거운 설비를 건설하기에 적합하지 않았고, 공사를 강행할 경우 기초공사를 위한 막대한 자금의 소요가 불가피했다. 그리하여 한국화성공업은 대한유화에게 부지를 바꾸자는 제안을 하게 된다. 대한유화는 고민스러웠다. 어쩌면 배정받은 북서쪽 부지에 비해, 동쪽 끝에 위치한 당시 한국화성의 부지가 접근성, 확장성 등에 있어 유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고민 끝에 대한유화는 그 요청을 받아들여 한국화성공업과 함께 상공부에 부지교환을 건의하게 되었다. 아직 공장들이 본격적으로 착공되기 전이라 큰 문제는 없었기에 상공부는 적법한 행정절차를 통해 두 회사의 요청을 무리 없이 수용했다. 결과적으로 당시 대한유화의 판단은 큰 이득을 가져왔다. 특히, PP의 주원료인 프로필렌을 대한석유공사의 나프타분해공장에서 관로수송으로 바로 공급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수송비용와 저장비용 등 초기 고정비용을 크게 절감할 수 있었다.
50년 전 그때 1차 실수요자 기업에 대한 정부의 평가와 판단, 정부 제안에 대한 이 회장 형제의 결단, 부지 설립 과정 중 일어난 한국화성과의 협상 등 창립 전후 대한유화 앞에 펼쳐진 수많은 선택지 중 하나라도 어긋났더라면 오늘의 대한유화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게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 판매전략 및 원가절감계획 수립

    PP 공장 건설계획을 수립하면서 대한유화는 판매계획도 함께 수립하여 공장 준공 이후 전개할 영업활동에 대비했다. 당시 국내외 PP 시장은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어 보다 면밀하게 시장상황을 전망하고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일본의 경우만 보더라도 1963년에는 PP 수요가 불과 2만 1,000톤에 불과했지만, 그 후에는 매년 50% 이상 늘어나 7년 만인 1970년에는 무려 60만 톤으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다른 합성수지의 수요 증가세보다 훨씬 높은 신장률을 보인 것이다.
    이 무렵 우리나라 역시 PP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하지만 1970년 당시에는 PVC와 폴리스티렌을 제외한 합성수지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는 실정인 데다, 기존 수입물량에 대한 통계조차 파악되지 않은 실정이어서 미래 수요를 정확하게 예측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에 대한유화는 수요기업들을 일일이 방문해 PP 사용량에 대한 현장조사를 실시했다. 이를 통해 수요량을 1970년 8,000톤, 1971년 1만 1,000톤으로 예측하고, 그 이후에는 매년 4,000톤씩 증가해 1975년에는 2만 7,000톤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이러한 추정치를 바탕으로 대한유화는, 생산량을 국내 수요에 우선 충당하고 국내 수요를 초과한 생산분은 국제가격으로 일본 마루베니를 통해 수출한다는 판매전략을 마련했다. 사실상 공장 건설 이전에 이미 판로를 확보함으로써 공장 가동 첫 해부터 생산량 전량을 판매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구축한 셈이다.
    한편으로 대한유화는 국제경쟁력과 가격 경쟁력을 강화해 대량공급을 실현한다는 목표 아래, 경영합리화와 생산성 향상을 추진하여 원가절감을 이루어내기로 했다. 차관 도입에 따른 이자와 지급보증료, 특허권사용료(License Fee), 기술료 등의 부담을 안고 있는 데다 공장 규모에도 차이가 있어 선진기업들과 동일한 여건에서는 가격경쟁이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국내 수요를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연구개발에도 전사적인 역량을 집중해 나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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