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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사

국내 석유화학산업의 성장과 위기
프롤로그 제1장 대한유화공업주식회사 창립 1970 1975 제2장 PP/HDPE 전문기업으로의 비약적 성장 1976 1988 제3장 위기극복 및 지속가능경영 기반 구축 1989 1998 제4장 사업의 다각화와 글로벌화 1999 2009 제5장 ‘종합석유화학회사’를 향한 제2의 도약 2010 2020 에필로그

국내 석유화학산업의 성장과 위기

  • 정부의 석유화학산업 육성 정책

    우리나라의 석유화학산업은 정부가 1967년에 시작된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중점사업으로 선정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성장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정부는 석유화학산업이 중요한 소재산업으로서 전·후방 산업에 미치는 효과가 크다고 판단하고, 제2, 3차 경제개발계획에 이어 제4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서도 석유화학산업을 중점적으로 육성하고자 했다.
    제4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서 정부는 전라남도 여천지구에 연산 35만 톤 규모의 나프타분해공장과 12개의 관련 계열공장이 들어서는 제2석유화학단지를 건설하기로 했다. 또 울산지구의 기존 석유화학단지도 나프타분해공장을 확장하고 7개의 관련 계열공장을 완공하는 등 공장의 신·증설을 추진하기로 했다. 계획한 공장들이 완공되면 기초원료의 공급원인 나프타분해공장의 생산능력은 에틸렌 기준으로 연산 10만 톤에서 50만 톤으로 무려 5배가 증가하고, 에틸렌 연산품인 프로필렌, C4유분, BTX(방향족 화학제품인 벤젠·톨루엔·자일렌) 등도 대폭 증대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제품별로 보면, 합성수지인 LDPE는 1976년 5만 톤에서 15만 톤으로, PP는 4.5만 톤에서 12.5만 톤으로, PVC의 원료인 VCM은 6만 톤에서 21만 톤으로, 합성섬유의 원료인 AN은 2.7만 톤에서 7.7만 톤으로, 카프로락탐은 3.3만 톤에서 13.3만 톤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기존 석유화학 제품의 생산능력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대폭 증가할 것으로 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동안 수입에만 의존해 오던 EG, TPA, EDC, SM, 올소-자일렌, 파라-자일렌, 페놀, 아세톤 등의 미개발 품목들도 1979년까지는 생산에 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았다. 이렇게 되면 석유화학산업은 수입대체 산업에서 수출 산업으로 그 성격이 변화하게 될 전망이었다.

  • 2차 석유파동과 국내 업계의 실적부진

    국내 석유화학업계가 2차 석유파동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여천석유화학단지 신설과 울산석유화학단지의 신·증설이 한창이던 때에 석유파동의 영향을 받으면서 석유화학업계도 큰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이다.
    1차 석유파동 때만 해도 국내 석유화학업계는 그동안 이어오던 성장세를 어느 정도 이어갈 수 있었다. 한동안 계속되던 성장세가 다소 주춤하기는 했지만 1976년에 큰 호황을 맞으면서 비교적 큰 타격 없이 경기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2차 석유파동 때는 세계경기가 얼어붙은 가운데 1979년 4월 긴축재정을 골자로 한 정부의 ‘경제안정화 종합대책’까지 겹치면서 불황의 골이 깊어졌다.
    결국 1980년에 석유화학업계는 전체적으로 약 1,000억 원의 적자를 기록하며 마이너스 3.1%로 역성장했다. 실적부진은 그해에 그치지 않고 1981년에도 약 900억 원의 적자로 이어졌다. 에틸렌 가격이 6.3% 신장하는 등 경기가 다소 회복되는 듯했지만, 이번에는 외국 제품들의 덤핑 공세가 발목을 잡았다.
    석유화학업계의 경영이 이처럼 악화된 데에는 경기침체에 따른 수요 부진 외에 국내 석유화학 제품의 가격구조가 이중으로 되어 있다는 점도 원인으로 작용했다. 당시 정부는 석유화학 제품의 내수시장은 빈약한 반면 수출용 원자재로서의 비중이 크다는 점을 감안하여 석유화학 제품 가격을 내수용과 수출용으로 구분해 책정하고 있었다. 수출지원 명목으로 수출용 공급가격을 내수용보다 저렴하게 책정하고, 수입의 경우에도 내수용 수입은 가급적 제한하고 수출용에 대해서도 일정한 수입 가이드라인을 초과할 때에는 실수요자들이 무제한 수입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2차 석유파동 이후 석유화학 제품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세를 보이는 가운데 수입 가이드라인이 오히려 공급가격 상한선으로 작용하는 바람에 석유화학업체들의 경영을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당시 석유화학 제품의 60% 이상이 수출용 원자재로 공급되었으므로 우리나라에 대한 덤핑 수출가격과 로컬가격을 연동한 것이 결과적으로 60% 이상의 출혈매출을 강요한 셈이 된 것이다. 이는 기업의 존립마저 위협하는 중대한 문제였다.
    이 때문에 석유화학업계의 적자행진은 1982년까지도 계속되었다. 정부가 서둘러 나프타 가격을 국제가격 수준으로 인하하면서 업계의 적자폭이 다소 줄어들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시장의 수요 회복세가 더딘 데다 외국 제품들의 지속적인 가격인하와 나프타 부족 현상이 겹치면서 계속되는 적자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다만 적자규모는 300억 원으로 전년에 비해 크게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1983년 들어서야 석유화학업계는 관련산업의 경기가 회복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생산과 가동률을 높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프타의 공급부족과 가격인상이 예상되고 값싼 외국제품이 계속해서 유입될 전망이어서 시장전망이 그다지 밝지는 않았다. 자연히 나프타 수급과 합성수지 수입자유화 문제가 석유화학산업의 핵심 이슈로 부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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