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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사

온산 나프타분해공장 건설의 의의
프롤로그 제1장 대한유화공업주식회사 창립 1970 1975 제2장 PP/HDPE 전문기업으로의 비약적 성장 1976 1988 제3장 위기극복 및 지속가능경영 기반 구축 1989 1998 제4장 사업의 다각화와 글로벌화 1999 2009 제5장 ‘종합석유화학회사’를 향한 제2의 도약 2010 2020 에필로그

온산 나프타분해공장 건설의 의의

  • 일관생산체제 구축으로 안정적 원료 조달

    대한유화는 1991년 11월 온산 나프타분해공장을 준공하여 가동을 시작했다. 마침내 업스트림 분야에 진출한 것이다. 이에 따라 대한유화는 업스트림에서 다운스트림으로, 즉 원료에서부터 합성수지까지 이어지는 수직계열화를 실현하여 석유화학 콤플렉스를 독자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나프타분해공장을 준공함으로써 대한유화는 안정적으로 원료를 조달할 수 있는 확고한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에틸렌 수요가 폭증하는 상황에서도 자체적으로 나프타분해공장을 가동함으로써 시장상황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고 원료를 조달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춘 것이다. 이는 대한유화의 사업경쟁력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에틸렌 기준 연산 25만 톤 규모의 나프타분해공장을 준공한 대한유화는 온산공장과 울산공장을 기반으로 하는, 명실상부한 종합석유화학업체로서 새롭게 출범하게 되었다.

  • NCC 완공 후 온산공장 전경(1991.)
  • 기술 확보 및 석유화학산업 성장 촉진

    시공 과정에서 대한유화는 다른 경쟁업체들과는 달리 공사 전반을 직접 관리·감독했다. 같은 시기에 나프타분해공장을 건설하던 경쟁업체들은 대부분 그룹사들로 그룹 내 계열 엔지니어링사와 건설업체를 연결하여 시공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유리한 점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단일기업인 대한유화는 건설 관련 계열사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 약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유화는 공사 전체를 직접 주관하면서 일반 건설업체들과 개별적으로 계약하여 시공하도록 했다. 이러한 방식은 예상과는 달리 경쟁업체들보다 공사기간을 단축하는 결과를 낳았다. 공기 단축에 따른 비용절감 효과도 적지 않았다. 또 대한유화의 기술력을 과시하는 동시에, 다수의 협력업체들과 파트너십을 형성하며 동반성장하는 효과도 있었다.
    나프타분해공장 건설과정에서 대한유화는 새로운 기술을 확보하는 성과도 거두었다. 나프타분해공장은 고도의 전문지식을 필요로 하는 석유화학 기초원료 생산시설로서, 이를 건설하고 운전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기술을 확보해야 한다. 대한유화는 국내에서는 부족한 기술을 미국의 루머스 크레스트, 일본의 도요엔지니어링 등으로부터 도입하여 국산화했다.
    기술도입 시에는 국내 용역업체들도 참여토록 해 기술이전의 효과를 볼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시설을 운영할 기술인력을 해외에 파견하여 새로운 기술과 정보를 습득하도록 함으로써 대한유화와 국내 석유화학산업의 기술향상을 도모했다. 온산 나프타분해공장의 건설은 무엇보다도 국내 석유화학산업의 안정적인 성장과 균형 발전에 기여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그동안 석유화학의 기초원료인 에틸렌과 프로필렌은 국내 공급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적지 않은 물량을 해외에 의존해야 했다. 하지만 온산공장을 준공함으로써 국내 석유화학산업 원재료의 대외의존도를 낮추고 원료 자급률을 높일 수 있게 되었다.
    온산공장을 건설함에 따라 대한유화는 국내적으로는 전방산업의 가동률 향상을 도모하여 내수시장의 안정을 기하고 수출산업에도 직·간접적으로 기여하게 되었다. 또한 국제적으로는 수입대체를 통해 1991년 기준으로 1억 5,500만 달러의 국제수지 개선효과를 가져와 그만큼의 외화를 절약할 수 있게 되었다.
    온산공장은 우리나라 석유화학업계의 원료부족 현상을 해결하고 계속되는 계열공장의 신·증설과 전방산업의 발전을 촉진하는 기폭제가 됨으로써 국내 석유화학산업의 균형발전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건설기간 중에 연 50만 명 정도의 기술자와 숙련공이 참여하고 준공 후에는 약 600명의 상시고용 효과를 창출한 것도 온산공장이 가져온 경제적 효과로 평가되었다.

  • NCC 준공 1년 후 준공식 진행(1991.11.) 초기 나프타분해공장 전경 온산 나프타분해공장 야경

BEHIND STORY

온산공장 건설 이전의 뒷 이야기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산읍 처용리 130에 위치한 온산공장은 1989년 1월 착공해 근 3년의 공사기간을 거치며 1991년 11월 준공되었다. 30년사, 50년사 등 역사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정부는 1986년 준공된 온산 제4석유화학단지에 신규 나프타분해공장을 유치하기로 하고 상공부가 중심이 되어 사업자 선정 작업을 시작했었다. 당시 유치를 신청한 회사는 대한유화를 포함해 7개 업체로서 대부분 국내 석유화학산업을 대표하는 대기업들이었다. 그리고 치열한 각축 끝에 대한유화는 1987년 5월 호남석유화학(여천)과 함께 새로운 나프타분해공장(NCC) 사업자로 선정될 수 있었다.
새로운 NCC 사업자로 선정됨으로써 이후 대한유화의 명운은 크게 변하게 된다. 비록 1990년대 공급과잉에 따른 재정 악화로 법정관리에 처하는 위기를 겪기도 하지만, 이를 극복하고 안정적 수직계열화를 구축하며 특화기술을 강화해 오늘의 발전을 일구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의 굴곡을 당시로써는 예측할 수 없었을 그뿐만 아니라 그저 먼 미래의 일이었던 터. 사업자 선정에 대한 축배는 잠시였고, 그때의 임직원들 눈앞에는 새로운 NCC 건설이라는 어마어마한 현안이 쌓여있을 뿐이었다.
그중 가장 큰 일은 부지 선정이었다. 정부는 온산을 제4석유화학단지로 지정하긴 했지만 그건 단지 지도상에 구획을 나누어 선으로 정리한 정도였고, 단지 내 부지 확보 등 사후 절차는 선정된 사업자가 직접 시행해야 했다. 이 부지 선정에 있어 당시 이정호 회장을 비롯한 경영진이 가장 중시했던 요건은 새로운 항만을 건설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간 울산공장에서는 용잠부두를 전용부두로 사용해 왔으나 큰 규모의 수송선을 수용하기에는 접안시설 규모에 한계가 있었다. 이에 NCC와 새로운 항만을 함께 건설할 수 있는 부지 확보가 절실했던 것이다.
숱한 검토 끝에 최적의 요건을 갖춘 곳은 바로 지금의 온산공장 부지였다. 하지만 당시 이곳은 공업지구로 지정되기는 했으나 개발이 안 된 상태였고, 개발권은 수자원개발공사가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건설부로부터 별도의 개발허가를 받지 않으면 부지를 확보할 수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대한유화는 이 개발 허가를 위해 며칠 동안 밤을 새우며 사업계획서를 작성했고, 치열한 경쟁입찰 과정 속에서 가장 먼저 허가 신청을 접수할 수 있었다. 뒷날 비공식적으로 전해진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쌍용정유(지금의 S-Oil)가 이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지만, 대한유화보다 3일 늦게 사업계획서를 제출하는 바람에 낙찰 받지 못했다고 한다.
천신만고 끝에 부지 개발권을 확보했지만 산 넘어 산이었다. 토지 매입과 보상 등을 통해 기존 주민들을 이전시켜야 하는 치열한 문제가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 일대에는 신기마을이라는 어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126세대 정도의 이 마을 거주민들은 대부분 대를 이어 어업에 종사하던 이들이었다. 새로운 공업단지 조성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신기마을 주민들은 대한유화 공장 건설에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어쩌면 당시 그들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연일 치열한 시위가 지속되었고 주민들과 대한유화는 험난한 협상을 반복했다. 협상이 어느 정도 진전을 보여 합의점에 도달할라 치면 그간 협상을 진행했던 주민 대표자가 교체되는 일도 비일비재 했다. 신기마을의 대표자가 자기 주민들을 모두 만족시키는 협의를 진행하지 못하면 주민들이 의결을 통해 바로 대표를 교체시키는 식이었다. 그러면 이제껏 진행됐던 협상은 하루아침에 무효가 되는 셈이었다. 그렇게 바뀌어 나간 신기마을 대표자가 50명이 넘어서기도 했다. 당시 협상업무를 담당했던 대한유화의 직원들의 노고와 고충은 이루 말로 다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대립은 서로가 만족할 만한 합의점이 도출되며 마침내 막을 내렸다. 세대별 이주 보상금과 함께 취업을 원하는 주민들에 대해서는 새로 건설되는 온산공장에 고용하겠다는 조건이었다. 주민들로서는 어업 터전을 잃게 되는 것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었고, 대한유화로서는 조건부 채용을 통해 감당하기 어려운 선까지 치솟던 이전 보상금을 낮출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대한유화의 NCC 사업 진출과 온산공장 건설은 50년 역사 중에서도 가장 큰 분기점으로 꼽힐 정도로 오늘날 의미 있는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그 역사적 성취 이면에는 비록 드러나지 않지만 위와 같이 당시를 성실하게 살아갔던 대한유화인들의 고충과 노고가 늘 함께 했었다.
이처럼 화려하게 기록되지 않을지라도 당대의 성과란 그 시대를 살아갔던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들이 모두 더해지며 만들어진다. 또한 보이지 않던 그 무형의 자산들은 역사의 행간에 자긍심과 성취로 체화되며 후세에 전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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