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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사

석유화학산업 위기의 배경
프롤로그 제1장 대한유화공업주식회사 창립 1970 1975 제2장 PP/HDPE 전문기업으로의 비약적 성장 1976 1988 제3장 위기극복 및 지속가능경영 기반 구축 1989 1998 제4장 사업의 다각화와 글로벌화 1999 2009 제5장 ‘종합석유화학회사’를 향한 제2의 도약 2010 2020 에필로그

석유화학산업 위기의 배경

  • 「공업발전법」 제정과 투자 자유화

    1990년 들어설 때만 해도 대한유화는 온산 나프타분해공장을 건설하여 독자적인 석유화학 콤플렉스를 운영하게 된 데 대해 큰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공장을 완공하기도 전에 여러 가지 문제가 불거지며 난관에 봉착했다.
    사실 모든 문제는 우리나라가 3저 호황을 누리던 1986년 무렵부터 시작이 되었다. 한동안 침체에 빠져 있던 경제가 살아나 최대의 호황 국면이 전개되자, 1986년 7월 1일 정부는 ‘공업기술 및 생산성 향상 등을 통해 공업의 균형 있는 발전을 도모하여 공업의 합리화를 촉진한다’는 취지에서 「공업발전법」을 제정·공포했다.
    이 법이 제정되면서 그동안 신규사업자의 시장 진입을 규제해 왔던 「석유화학공업발전법」이 폐지되었다. 이에 따라 석유화학산업에 대한 투자가 사실상 자율화되었고, 석유화학산업 진출을 꿈꿔왔던 대기업들의 시장 진입이 가능하게 되었다.
    「공업발전법」의 제정 취지에 맞춰 1988년 7월에는 정식으로 ‘석유화학산업 자유화’ 조치가 단행되었다. 1990년 1월부터는 어느 기업이든 자유롭게 석유화학산업에 참여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석유화학산업이 전자, 자동차와 더불어 1990년대의 산업지형을 바꿀 기간산업이라고 판단한 정부가, 막강한 자금력을 가진 대기업들의 참여를 유도하고자 투자자유화 조치를 단행한 것이다.
    석유화학산업 투자가 자유화되고 시장 전망도 밝은 것으로 예측되자, 삼성을 비롯하여 현대, 럭키금성(지금의 LG), 한국화약(지금의 한화), 롯데, 효성, 동부, 금호 등의 그룹회사들이 이 분야에 뛰어들었다. 이 기업들은 「공업발전법」이 제정되자마자 경쟁적으로 나프타분해 사업, 또는 나프타분해 사업을 포함한 계열사업에 진출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대규모 설비투자에 착수했다. 이때만 해도 경제계에서는 석유화학산업이 이른바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인식이 강해, 대기업과 중견기업을 가리지 않고 앞을 다퉈 석유화학산업에 진출하고자 한 것이다.
    「공업발전법」의 제정과 석유화학산업 투자자유화 조치는 중장기적으로 우리나라 석유화학산업의 외연을 확장하고 국제경쟁력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국내 최대 기업인 삼성과 현대의 석유화학산업 진출은 국내 석유화학산업이 규모의 경제를 갖춘 대규모 사업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단기간의 집중적인 설비투자가 공급과잉을 불러와 1990년대 초 석유화학산업이 커다란 혼란과 위기에 직면하는 요인이 되었다.

  • ‘공급과잉’ 우려의 확산

    기업들의 석유화학산업 진출 규제가 완전히 해제되자 석유화학산업에 대한 신규 참여가 늘어나고 시설투자는 급격히 증가했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삼성과 현대의 움직임이었다. 삼성종합화학과 현대석유화학은 1991년 준공을 목표로 1989년에 이미 대산석유화학단지에 나프타분해공장을 포함한 시설투자를 시작했다.
    그러자 다운스트림 사업자인 럭키석유화학(지금의 LG화학)도 1991년 나프타분해공장, 1992년 HDPE공장 준공을 목표로 투자를 결정했고, 한양화학(지금의 한화케미칼) 역시 나프타분해공장 건설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또 대한석유공사와 대림산업 등 기존의 원료 공급업체들도 나프타분해 사업만으로는 생존에 위협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다운스트림 분야에 진입을 서둘렀다. 업스트림 업체들은 다운스트림 분야로, 다운스트림 업체들은 업스트림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겠다고 나섰다.
    이처럼 많은 기업들의 신규 투자가 한꺼번에 몰리게 되자 자칫 공급과잉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기 시작했다. 언론에서도 연일 공급과잉을 우려하는 보도를 내보냈다. 실제로 기업들의 신규투자 계획을 종합해보면 과잉공급이 불 보듯 뻔해 보였다.
    더구나 수출 전망도 녹록치 않았다. 국내 석유화학업계의 수출시장 가운데 90% 이상을 차지하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1988~1992년 사이에 에틸렌 기준 443만 톤에 이르는 생산설비를 신·증설할 계획이어서 수출시장이 그만큼 줄어들게 된 것이다. 심지어 중동 산유국들도 나프타에 비해 원가부담이 상대적으로 낮은 에탄(Ethane) 등을 원료로 하는 석유화학산업을 확대하고 나서는 중이어서 나프타를 수입하는 국내 업계는 경쟁력 확보가 더욱 어려울 것으로 전망되었다.
    이처럼 내수시장의 공급과잉과 수출시장의 판로 위축이 우려되자 정부는 과잉·중복 투자를 방지하기 위해 기업들의 신규 투자가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유도하고 나섰다. 특히 1989년에 이미 투자를 시작한 삼성종합화학과 현대석유화학에 대해, 1990년 이후 투자를 계속하되 1992~1993년 2년간 생산하는 LDPE, HDPE, PP 등의 제품은 생산량의 50% 이상을 의무적으로 수출하도록 하는 등의 투자조정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이 되자 정부로부터 정식으로 나프타분해 사업자로 선정된 대한유화를 비롯하여 호남석유화학, 럭키석유화학, 한양화학 등 합성수지를 생산하는 다운스트림 업체들이 업스트림 분야로 속속 진출했다. 반대로 대한석유공사, 대림산업 등 기존의 업스트림 업체들은 관련 계열제품을 판매하는 다운스트림 분야의 설비를 대거 확충했다. 그야말로 공급과잉의 쓰나미 속에서 무한경쟁을 펼쳐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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