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사
세계 최초 PP/HDPE 병산 공장 건설
HDPE 사업자로 선정
1973년 2월 15일 열린 제3기 정기주주총회는 제1공장의 증설과 함께 HDPE를 생산하는 제2공장 건설 계획을 함께 승인했다. 이에 따라 대한유화는 제1공장 증설 공사를 진행하는 동안 제2공장 건설 작업도 시작했다.
대한유화가 제2공장 건설에 나선 것은 당초 예상보다 빠르게 성장하는 시장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석유화학산업은 정부의 석유화학산업 육성 정책에 힘입어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중이었다.
사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던 1962년만 해도 석유화학 제품의 수요는 에틸렌 기준으로 연산 4,000톤에 불과했다. 그러나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된 1967년에는 2만 4,000톤으로 늘어났고,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된 1972년에는 12만 1,000톤으로 급증했다. 10년 사이에 무려 30배나 신장한 것이다.
이 같은 성장세는 PP의 경우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PP는 PVC나 LDPE(저밀도 폴리에틸렌, Low Density Polyethylene)에 비해 역사도 짧고 수요 개발도 비교적 늦게 시작되었다. 이 때문에 1968년만 해도 PVC가 1만 6,171톤, LDPE가 1만 9,300톤의 수요를 가진 데 비해 PP는 1,641톤에 불과했다. 그러나 1971년에는 1만 6,064톤으로, 3년 사이에 10배 가까이 증가했다.
이처럼 국내 석유화학산업은 10여 년의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성장을 이루어냈다. 중요한 것은 그 이후에도 성장 전망이 매우 밝다는 점이었다.
이 같은 추세에 따라 정부는 석유화학 제품의 수요 증가에 대비하고 우리나라 석유화학산업의 균형 있는 발전을 꾀한다는 취지에서 ‘제2차 석유화학 기초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전라남도의 여천지구에 국제 규모의 제2석유화학단지를 건설하고, 울산지구는 기존 나프타분해공장과 관련 계열공장을 확장하거나 신규 공장을 건설하여 단지 규모를 확대한다는 등의 내용이 골자를 이루었다.
그 중에는 HDPE 공장을 포함한 4개 공장을 새로 건설한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HDPE는 PP와 물성이 비슷하고 제조공정, 가격, 용도 등이 유사하다는 특징이 있다. 이 때문에 당시 국내의 일부 화학업체들은 용도에 따라 PP의 대체용으로 HDPE를 사용하기도 했다. 따라서 HDPE의 수입량은 크게 늘어나는 추세를 보였다.
이 같은 수요 증가 현상을 반영하여 정부는 HDPE 공장을 새로 건설하기로 하고 사업자 선정 절차에 들어갔다. 이에 대한유화와 한국화성이 치열하게 경합을 벌였으나, 1972년 12월 대한유화가 사업자로 최종 선정되었다. 대한유화는 이미 PP를 생산하고 있는 데다, HDPE는 PP와 동일한 계통의 촉매를 사용하기 때문에 대한유화를 사업자로 선정하는 것이 경제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BEHIND STORY
첫 PP Powder가 생산되던 순간
신종건 전 공장장의 회고
PP Powder
1970년 6월 2일 회사가 창립되었지만 약 1년간 차관 및 합작투자에 대한 계약 등을 체결하느라, 울산 PP 공장의 착공은 1971년 3월에 이르러 시작할 수 있었다. 나를 포함한 창립멤버들은 그 사이 합작사로 결정된 일본 치소엔지니어링의 엔지니어들과 함께 울산 숙소에서 기거하며 밤낮과 휴일 없이 시공사 선정과 설계, 자재 구매 등의 업무를 강행해 나갔다.
당시 단지 내 다른 실수요자들은 공장을 건설하는데 있어 설계와 시공은 물론 대부분 자재들까지 외국에서 들여왔으나, 대한유화는 토목건축부분 국내 기술수준이 외국에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대부분 건설 공정을 국내 시공사(제일토건사)에 맡겼다. 이는 믿음과 실리와 공생을 중시하는 개성상인 경영철학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우리의 믿음에 보답이라도 하듯 시공사는 사장이 직접 나서 현장과 공정을 책임지며 공기 내내 성실하게 역할과 책임을 다 해준 것으로 기억한다. 결국 이러한 상호 간 믿음은 시너지로 이어지며 일정 계획 대비 실행률 100%에 가까운 성과를 나타냈고, 결국 1972년 6월 전체 1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내 울산공장을 준공할 수 있었다.
남은 과제는 첫 생산이었다. 공장이 건설되는 동안 우리는 수개월간 일본 치소석유화학에서 파견 연수를 받으며 많은 기술과 매뉴얼을 습득했다. 이후 공고를 통해 채용한 약 40명의 생산직 직원들로 생산라인 가동 준비를 마쳤다. 1972년 6월 16일 공장 완공과 함께 시운전은 개시했으나 아직 촉매를 투입해 제품을 생산하지는 않은 상태였다.
D-Day로 잡힌 날은 1972년 8월 5일 오전 10시. 이정림 사장님, 이정호 부사장님, 강수철 전무님과 합작회사 경영진 및 임원진들이 모두 모여 Control Room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나는 일본인 기술감독과 함께 첫 촉매를 투입했다. 그러나 중합반응은 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오후가 되고 저녁이 되어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 원인에 대해 기술진의 토론과 분석이 계속됐고, 새 촉매 조제 및 투입을 진행했다. VIP들 역시 영빈관에서 초조하게 희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생산조가 새벽조로 교체된 늦은 밤, 관찰창을 통해 밀가루 같은 분말들이 조금씩 흩날리기 시작했다. 나와 일본인 기술자는 가슴이 벅차올랐으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새벽에 들어선 오전 4시 경, 분말의 양은 점차 많아졌다. 그제야 일본인 감독관이 PP Powder가 성공적으로 생산되고 있다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는 뜨거운 가슴을 진정시키며 시료 채취관을 통해 처음 생성된 하얀 분말을 손으로 만져봤다. 내 손에 쥐어진 이 백색 가루가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생산된 PP 제품이라고 생각하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곧바로 성공적 결과에 대한 보고가 올라갔고, 영빈관에 있던 VIP들이 아침 일찍 다시 모였다. Control Room에서는 전날 터뜨리지 못한 폭죽과 샴페인이 다시 쏘아올려졌다.
이 결과는 즉각 청와대에도 보고됐다. 당시 울산석유화학단지는 포항제철단지와 함께 정부의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핵심정책이었다. 이에 청와대에서는 주간 단위로 단지 내 공장 건설 진척도를 파악하고 있었다. 남들보다 비교적 늦게 시작한 대한유화가 13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에 공장을 준공하고 상업생산까지 차질 없이 진행한 것은 정부 입장에선 성공적인 사례로 삼을만한 일이었다. 이처럼 모범적인 결과를 토대로 1972년 10월 3일 거행된 석유화학단지 종합 준공식에서 우리 회사 강수철 전무가 대통령으로부터 철탑산업훈장을 수훈했다.
제2공장 준공(PP/HDPE - 35,000톤)
HDPE 사업자로 선정된 대한유화는 1973년 1월 16일 이미 제1공장 건설과정에서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있던 일본의 치소엔지니어링과 기술도입계약을 체결하고 공장 건설 준비에 들어갔다.
기술도입계약에는 기술소유자인 미국의 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과 일본 치소엔지니어링으로부터 연산 3만 5,000톤의 HDPE 제조 및 판매를 위한 특허와 노하우를 제공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특허료는 90만 달러를 제공하기로 했다. 만약 3만 5,000톤을 초과하여 생산하는 경우에는 톤당 14달러를 추가로 제공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대한유화는 새로 건설하는 HDPE 공장을 ‘제2공장’으로 부르기로 확정하고, 1973년 9월 1일 착공해 공사를 진행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제2공장 가동계획에 차질이 빚어질 변수가 발생했다. 제2공장은 대한석유공사가 나프타분해공장을 증설하여 생산하는 에틸렌을 공급받아 가동할 예정이었는데, 1974년 5월 무렵까지도 이 공장이 증설공사에 들어가지 않아 제2공장의 가동이 늦어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예정대로 1975년에 완공되더라도 자칫 정상가동을 하지 못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대한유화는 제2공장에서도 PP를 제조·판매할 수 있도록 설계를 변경하기로 했다. 마침 제1공장 증설에도 불구하고 밀려드는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PP 수요가 급증하는 추세였으므로, 제2공장에서도 PP를 생산할 수 있도록 조정하기로 한 것이다.
말하자면 PP/HDPE 병산체제로 공장을 건설하여, 대한석유공사 나프타분해공장 증설공사가 완료돼 에틸렌을 공급받을 때까지 제2공장에서 PP를 제조·판매하겠다는 복안이었다.
나아가 향후에도 에틸렌 수급 상황에 따라 PP 또는 HDPE 두 제품을 전환하여 생산함으로써 시장의 수요에 유연하게 대응하겠다는 복안이었다. 이에 따라 대한유화는 1974년 초 치소엔지니어링과의 계약 내용을 부분적으로 수정하여, 제2공장을 PP/HDPE 병산공장으로 재구성했다.
PP와 HDPE를 병산할 수 있게 공장을 건설하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는 대한유화 제2공장이 세계 최초의 PP/HDPE 병산공장(Swing Plant)이 되는 셈이었다.
대한유화는 내자 371만 623달러와 외자 1,230만 1,690달러 등 총 1,601만 2,313달러를 투입해 1975년 9월 30일 제2공장 건설공사를 완료했다. 그리고 10월 28일 시험가동을 마치고 10월 30일 정식으로 준공했다.
이 공장은 기본적으로 PP 공장인 제1공장과 동일한 구조로 건설되었다. 다만 각 기기, 배관 등의 사이즈와 용량은 제1공장보다도 크게 설치했다. 따라서 만일 PP를 생산할 경우 여기에 후속 공정인 펠렛타이저(Pelletizer)를 추가하는 것만으로도 생산량을 증대할 수 있도록 했다.
이로써 대한유화는 창립 5년여 만에 PP와 HDPE 2개의 공장을 운영하는 대단위 석유화학기업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특히 제2공장은 세계 최초의 PP/HDPE 병산공장으로서 업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제2공장 증설(PP 연산 2만 4,000톤)
제2공장을 준공함에 따라 대한유화는 연산 4만 5,000톤 규모의 PP 공장과 PP 및 HDPE 병산이 가능한 연산 3만 5,000톤 규모의 HDPE 생산공장을 운영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국제경쟁력을 갖춘 뛰어난 품질의 제품을 국제가격보다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제2공장이 준공되기도 전에 이미 PP는 시장의 수요를 충당하기 어려울 만큼 공급이 부족한 상황이 되었다. 1973년 12월에 한 차례 증설을 실시했음에도 불구하고 PP 수요가 공급능력을 초과한 것이다.
이에 대한유화는 제2공장의 PP 생산능력을 2만 4,000톤 더 높이기로 했다.
이미 공장 건설 당시 향후의 증설 가능성에 대비하여 기기 및 배관 등의 사이즈와 용량을 제1공장보다 크게 설치한 상태였으므로, 증설을 위해서는 후속공정인 펠렛타이저를 설치하는 것만으로도 가능한 상황이었다.
대한유화는 164만 달러를 투입하여 HDPE 공장에 펠렛타이저와 부대시설을 추가로 설치했다. 펠렛타이저 1기를 추가하는 이 증설공사는 1977년 1월 30일 착공하여 1977년 10월 12일 완공되었다. 그 이후 대한유화는 1980년과 1986년에도 제2공장에 reactor 1기씩을 추가로 설치하여 급증하는 시장 수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자 대비했다.
BEHIND STORY
위기를 기회로 만든 발상의 전환
최초의 PP/HDPE 병산공장 건설
1972년 12월 제2차 석유화학 기초계획에 따라 대한유화는 새로운 HDPE 실수요자로 선정되었다. 당시 한국화성과 치열한 경합을 벌였지만, PP와 HDPE는 기본적인 공정・물성・용도 등에서 유사점이 많아 비용 절감, 과당경쟁 등을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낙점을 받을 수 있었다. 선정 이후 대한유화는 연산 3만 5,000톤 규모의 HDPE 공장 건설을 위한 기술도입 등의 제반계약을 체결하고 1973년 9월부터 착공을 시작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애초 새로운 선정자가 신설하는 제2공장 HDPE의 원료는 제2차 석유화학 기초계획에 함께 포함된 대한석유공사 나프타분해공장의 증설분에서 생산되는 에틸렌을 수급 받기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여러 가지 문제로 HDPE 원료를 공급해야 할 대한석유공사 공장의 증설 착수가 1974년 5월까지에도 시작되지 못한 것이다. 이미 HDPE 공장 건설을 한창 진행 중이던 대한유화로서는 큰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1975년 9월경에 제2공장이 완공되지만 수급 받을 원료가 부족해 공장을 제대로 가동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었다. 내외자 도합 1,600만 달러가 넘는 차관을 도입한 상태에서 이는 창사 이래 처음 맞이하는 큰 위기라 할 수 있었다.
이 때 대한유화는 과감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대한석유공사으로부터 원료를 정상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을 때까지 HDPE 공장에서 PP를 생산할 수 있도록 병산설비를 설계하는 것으로 발상을 전환한 것이다. 제품공정의 특성상 두 공장의 기본적인 구조가 거의 동일한 한편, PP 공정에 비해 배관 사이즈 및 용량이 오히려 컸기에 펠렛타이저(Pelletizer, 제립기) 등 극소수의 장치들만 보완된다면 기술적으로 충분한 일이었다. 대한유화는 망설임 없이 병산설비를 갖추기 시작했고, 이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최초의 PP/HDPE 병산공장 건설로 이어졌다.
대한유화의 선택은 적중했다. 제2공장이 완공된 1975년 이후 국내 PP 수요는 매년 20% 이상씩 지속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그에 비해 HDPE는 공급과 수요가 안전적인 균형을 이루는 편이었기에 제2공장은 시황에 맞춰 유동적으로 두 제품의 공급을 이뤄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PP 수요가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늘어나자 1977년에는 제2공장에 펠렛타이저 1기를 추가로 증설하며 PP 생산량을 크게 증가시키기도 했다.
만일 1974년 당시 대한석유공사의 나프타공장 증설에 소극적으로 대처하여 HDPE 단일 공장계획을 고수했더라면, 당시의 경제적 손실은 물론 PP 수요 급등에 따른 기회로 충분히 대비하지 못했을 것이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선택, 대한유화의 혜안이 빛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