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사
제4공장 건설
제4공장 건설 계획 수립
대한유화가 제3공장을 준공한 1979년 초 국내 석유화학산업은 커다란 변화를 앞두고 있었다. 정부가 제3,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핵심과제로 추진한 여천석유화학단지 공사가 10월 준공을 앞두고 있어 석유화학산업의 새로운 중흥이 예상되고 있었던 것이다. 여천석유화학단지는 에틸렌 기준으로 연간 35만 톤 생산규모의 나프타분해공장을 포함하여 5개사 12개 공장으로 구성돼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 시기에는 화학산업이 크게 성장하면서 석유화학 제품에 대한 수요가 더더욱 증가하고 있었다. 세계적으로도 1차 석유파동의 후유증에서 벗어나 호황을 누리는 중이어서 석유화학산업의 비약적인 성장이 예상되었다. 국내에서도 여천석유화학단지뿐 아니라 울산석유화학단지의 주요 기업들이 앞을 다퉈 공장 신·증설에 나서고 있어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였다.
이에 대한유화는 제3공장 준공 직후인 1979년 2월 제4공장을 건설하기로 하고 곧바로 준비에 들어갔다. 이미 가동 중인 기존 공장 인접부지에 연산 PP 8만 톤 규모의 설비를 신설해, 국내 기업들의 수요증가에 대비하면서 규모의 경제에 따른 생산효율 증대를 꾀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당초에는 3만 5,000톤 규모의 HDPE 공장을 건설할 계획이었으나, 제3공장을 HDPE 공장으로 건설한 이후 PP의 수요를 충당할 필요가 커졌기 때문에 PP 8만 톤으로 변경했다.
제4공장 신설을 위한 자금은 896만 6,000달러의 외자와 1,303만 4,000달러의 내자를 합쳐 총 2,200만 달러로 잡고, 자체자금 1,393만 600달러와 공금융 융자 806만 9,400달러로 충당하기로 했다. 그 중 기계 신설을 위한 자금은 2,000만 달러로, 해외에서 도입하는 기계시설에 796만 3,800달러, 국산 기계시설에 1,203만 6,200달러를 투입하기로 했다. 기계설비 비용의 60% 이상을 국산제품에 투입함으로써 장비 국산화에 기여하기로 한 것이다.
공정기술 역시 제3공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외부의 기술을 도입하지 않고, 당시 대한유화가 사용하고 있던 Standard-Chisso 공법에 대한유화 기술진이 자체 개발한 기술을 혼합한 방식을 적용하기로 했다.
제4공장 준공 및 증설
대한유화는 제3공장을 준공한 다음날인 1979년 2월 1일 제4공장의 부지 정지작업에 착수했다. 그리고 2개월 만인 3월 30일 정지작업을 완료해 본격적인 공사 착공에 대비했다.
그러나 실제 공사는 곧바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정지작업을 완료하고 설치할 기계설비의 발주까지 마쳤으나, 때마침 2차 석유파동의 여파로 경제상황이 불안정해져 착공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석유파동의 영향으로 유가가 급등하고 시장이 급격히 얼어붙은 데다, 금융시장도 경색되어 자금조달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결국 대한유화는 공사 착공을 무기한 연기하고 시장 변화를 예의 주시했다. 그리고 세계 석유화학산업의 경기가 석유파동으로 인한 불황에서 벗어나 상승 국면으로 전환되던 1983년 11월 19일에야 비로소 공사를 재개했다. 부지 정지작업을 완료한 지 4년 6개월여가 지난 후에야 본격적인 건설공사에 들어간 것이다.
다행히 공사는 큰 어려움 없이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그 결과 제4공장은 착공 1년 만인 1984년 11월 10일 준공하여 가동을 시작했다.
당시 국내 시장은 제4공장 건설공사가 추진되던 1983년 무렵부터 수요가 급격히 늘기 시작해 심각한 수준의 공급부족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대한유화가 시설을 확장하여 제4공장을 준공한 것은 시장의 공급부족 현상을 해소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적기에 공장을 준공하여 국내 석유화학시장의 수급 불균형을 해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제4공장은 1987년 1기, 1997년 2기, 2018년 1기의 reactor를 추가로 설치하며 국내뿐 아니라 해외의 수요 증가에도 효과적으로 대응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