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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공장 건설
프롤로그 제1장 대한유화공업주식회사 창립 1970 1975 제2장 PP/HDPE 전문기업으로의 비약적 성장 1976 1988 제3장 위기극복 및 지속가능경영 기반 구축 1989 1998 제4장 사업의 다각화와 글로벌화 1999 2009 제5장 ‘종합석유화학회사’를 향한 제2의 도약 2010 2020 에필로그

제5공장 건설

  • 제5공장 건설계획 수립(PP/HDPE 병산)

    1983년 무렵부터 경기 호전의 조짐을 보이던 석유화학산업은 1980년대 중반 들어 수요가 급증하며 호황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980년대 초만 해도 고유가·고금리·고환율 등 이른바 ‘3고(高)’ 현상으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1980년대 중반 무렵 원유가격 하락과 달러가치 하락, 국제금리 하락 등 ‘3저(低)’ 현상이 나타나면서 전에 없던 호황을 누리게 된 것이다. 해외원유, 외자, 수출에 의존하여 경제발전을 이어 온 우리나라로서는 최대의 호기(好機)를 맞은 셈이었다.
    호황 기조는 점점 더 뚜렷해졌다. 연속적인 원유가격 하락으로 석유화학 제품 가격이 인하됨에 따라 수입대체 수요가 증가하고, 우리나라의 주력 수출품목도 전기, 전자, 자동차 등으로 바뀌면서 합성수지의 수요도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그러자 많은 기업들이 시장주도권을 잡기 위해 앞을 다퉈 생산능력 확충에 나섰다.
    하지만 기업들이 건설 중이거나 계획하고 있던 신·증설 공사들이 계획대로 완공된다 해도 공급부족 현상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었다. 무엇보다도 PP·PE 제품의 수요가 크게 증가했다. 식품포장재, 농업용 및 산업용 Film, 어망, 로프, 섬유류, 각종 용기, 전기전자부품 등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이들 화학제품의 기초원료인 PP/PE의 수요도 급격히 증가한 것이다.
    당시 PP와 PE의 국내 공급능력은 PP가 25만 톤, PE가 18만 톤 등 43만 톤 수준이었으나, 1988~1989년에는 PP/PE 수요가 당시 공급능력의 두 배인 83만 7,000톤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며 기존 업체들의 설비확장에 더해 정유업체들까지 석유화학산업에 진출하려 하였다.
    이 같은 시장 전망에 따라 대한유화는 이 시기야말로 사세를 확장하는 데 더없는 기회가 될 것으로 판단하고 시설을 확장하기로 했다. 연산 8만 톤 규모의 제5공장을 조속히 건설해 시장 변화에 대응하기로 한 것이다. 다만 제5공장은 시장 수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제2공장의 경험을 살려 PP/HDPE 병산공장으로 건설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부족할 것으로 예상되는 국내 수요를 충족하는 데 기여하는 동시에 수출시장도 확대하겠다는 복안이었다.
    제5공장을 신설하면 연간 약 1,800만 달러어치를 수출하여 우리나라의 국가적 목표인 무역수지 흑자 달성에도 기여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또 약 70명의 현장직원을 채용하고 관련업계에도 간접고용효과를 불러옴으로써 고용 창출이라는 과제에도 적극 부응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에 따라 대한유화는 1986년 7월 30일 이사회를 열고, PP/HDPE 병산설비 8만 톤을 추가로 건설하기로 의결했다.
    이날 이사회는 내수는 물론 수출시장에서도 대한유화가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하고, 수출에 주력한다면 1988년부터 PP 5~6만 톤, HDPE 1만 5,000~2만 톤을 수출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다만 시장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필요에 따라 PP와 HDPE를 임의로 선택하여 생산할 수 있는 병산공장으로 건설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 제5공장 준공

    대한유화는 기존 공장시설의 잔여부지 가운데 6만여㎡를 활용하여 제5공장을 세우기로 했다. 제5공장은 세계 최초의 병산공장인 제2공장 건설 경험을 살려 PP와 HDPE를 생산할 수 있는 병산공장으로 건설하기로 했다.
    대한유화는 당시 회사가 채택하고 있던 PP 아모코(Amoco) 공법에, 자체 기술진이 개발한 균일한 품질의 제품생산 및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 관련 신기술을 혼합한 제조방식을 선택했다.
    또한 병산설비는 추가 설비를 도입할 필요 없이 일부 계측기와 배관재 등을 보완하는 것만으로도 설비 구성이 가능하기 때문에, 유틸리티, 저장 설비, 원료 하역 및 이송 설비, 공해방지 설비 등을 공용 사용토록 해 건설비를 절감하기로 했다. 공장 건설을 위한 자금은 내자 1,400만 달러와 외자 1,695만 달러를 합해 총 3,095만 달러를 자체자금으로 조성하여 투입하기로 했다.
    원료조달 계획도 미리 마련했다. 원료를 조달하는 데 있어 대한유화는 국내 석유화학산업의 발전을 촉진하고 국가경제의 건실한 성장에 기여한다는 취지에서 가능한 국내 제품을 우선적으로 구매하기로 했다.
    먼저, 주원료인 프로필렌과 에틸렌은 대한석유공사(지금의 SK종합화학)과 호남에틸렌(지금의 여천NCC)의 나프타분해공장 증설이 완료되는 1989년까지는 수입하여 사용하되, 그 이후에는 이들 업체에서 공급받기로 했다. 동시에 원료수송은 지하에 매설한 기존의 관로를 활용하고, 제품 및 부자재류는 화물 트럭으로 안전하게 반출한다는 계획도 세워두었다.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한 대한유화는 1986년 8월 1일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눈에 띄는 것은, 제5공장의 경우 이미 가동 중인 제1·2·3·4공장에 비해 공장의 외형이 더 큰 규모로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기술지원을 맡은 일본의 치소엔지니어링이 체코의 8만 톤급 공장을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기술감독관에게 의존해 공장을 건설했던 과거와는 달리, 대한유화 자체 기술진이 직접 설비의 제작·감독을 수행하고 볼탱크(Ball Tank, 고압용 가스 저장탱크)도 국내에서 직접 제작하는 등 자체 기술을 최대한 활용했다는 점도 눈에 띄는 점 가운데 하나였다. 이를 통해 대한유화는 기술비용의 부담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더 많은 기술을 축적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제5공장은 착공 9개월여 만인 1987년 4월 20일 준공하여 가동을 시작했다. 이에 따라 제5공장은 제2공장과 함께 세계적으로도 유일한 PP/HDPE 병산 제조설비로 탄생하게 되었다.
    한편, 대한유화는 하루가 다르게 증가하는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제5공장 건설이 한창이던 1986년 9월 증설공사도 병행하기로 하고 공사에 착수했다. 이에 따라 제5공장은 신설과 증설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증설공사는 착공 1년여 만인 1987년 8월 준공하여 9월부터 조업을 시작했다. 본공사와 증설공사가 동시에 진행됨에 따라 제5공장은 10만 톤 규모로 가동하게 되었다.
    하지만 제5공장은 병산공장임에도 불구하고 고품질 PP의 수요가 예상보다 빠르게 증가함에 따라 1997년에 reactor 2기를 추가 설치하기 전까지 10년여 동안은 PP 생산 위주로 운영되었다.

  • 제5공장 건설현장(1987.02.)
  • 제5공장 건설현장(198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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