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사
창사 이래 최대 시련의 시작
건설비용 증가로 인한 경영위기
대한유화는 1988년 11월 정부로부터 정식으로 나프타분해 사업자로 선정돼 온산공장 건설을 시작했다. 그런데 정부가 1990년 1월 1일자로 석유화학산업에 대한 투자를 자유화하기로 방침을 정하자 다수의 대기업들이 정부의 허가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공장 건설을 추진하고 나섰다. 심지어 석유화학에 별다른 관심이 없던 기업들조차 석유화학산업에 진출하겠다고 나섰다. 그러자 공급과잉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과잉 투자가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다.
과잉 투자는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먼저, 공장 건설비용이 천문학적으로 치솟았다. 여러 기업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공장 건설에 나서는 바람에 건설시장에서 자재와 인력이 품귀현상을 빚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기자재 발주단가가 높아지고 건설인력들의 임금도 큰 폭으로 뛰어올랐다.
예를 들어 월 100만 원 수준이던 용접공의 노임이 업체 간 스카우트 경쟁으로 인해 250만 원을 훌쩍 넘어설 만큼 인건비가 치솟았다. 또 국산 기계 제작비가 폭등한 것은 물론 외국산 기계 제작비와 기술료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이로 인해 막대한 외화가 낭비된 것도 문제지만 건설비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급증했다.
그러자 다수의 전문가들과 언론이 “현재 건설 중인 신규 유화공장의 투자비용이 당초 계획보다 50% 이상 뛰어올라 국내 유화산업의 경쟁력 확보에 큰 문제점으로 대두되고 있다”(1990년 12월 13일자 매일경제신문)며 우려를 나타냈다. 하지만 별다른 대책이 나오지는 않았다.
대한유화도 건설비용 증가의 파고를 피해갈 수 없었다. 당초 대한유화는 2,300억 원의 예산으로 나프타분해공장을 건설하고자 했다. 그러나 실제 투입된 비용은 그 두 배를 넘어서는 4,800억 원에 달했다. 이로 인해 대한유화는 계획에도 없던 추가공사비 2,500억 원을 금융기관으로부터 추가 차입해야 했고, 매월 70억 원 정도의 이자부담을 떠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대한유화는 온산공장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시설투자비와 이자를 포함해 5,000억 원의 부채를 짊어지게 되었다. 또 1991년에 96억 원의 적자를 기록한 데 이어 온산공장이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간 1992년에는 무려 546억 원이라는 최악의 적자를 기록했다. 온산공장의 투자비 증가가 경영을 위태롭게 할 만큼 부담이 된 것이다.
결국 재무구조도 크게 악화되었다. 1992년 말 기준으로 대한유화는 자산 8,168억 원, 부채 6,923억 원, 자본 1,245억 원으로 부채비율이 500%를 훌쩍 넘어섰다. 대한유화에게 어두운 시련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것이다.
출혈경쟁 속의 재무구조 악화
과다한 건설비용을 감수하면서도 준공을 서두른 공장들이 하나 둘 완공돼 가동에 들어갔다. 1991년 한 해에만 해도 삼성종합화학과 현대석유화학의 대산석유화학단지 설비가 완공돼 가동을 시작했고, 곧이어 대한유화와 럭키석유화학, 호남석유화학, 한양화학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시장에 진입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 석유화학업계의 에틸렌 생산능력은 1990년 115만 5,000톤에서 1991년 말에는 245만 5,000톤으로, 그리고 1992년 말에는 315만 5,000톤으로 급증했다. 1993년에는 357만 톤으로 늘어났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는 세계 5위의 석유화학 제품 생산국으로 올라서게 되었다.
공급능력이 확대됨에 따라 석유화학산업의 국내 자급률도 1989년 77.8%에서 1993년에는 124%로 높아졌다. 특히 합섬원료를 제외한 합성수지와 합성고무는 국내 생산량의 40% 가까이를 수출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공장건설 비용보다 더 큰 문제가 이때부터 불거지기 시작했다. 공장 신·증설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우려했던 공급과잉현상이 1991년 하반기부터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공장들이 대거 가동을 시작하면서 국내 석유화학시장은 합성수지·합성고무·합성섬유 등 3대 석유화학 제품 전 품목에서 걸쳐 공급과잉사태가 벌어졌다.
그 중에서도 합성수지 부문이 가장 심각했다. 1993년 기준으로 국내 합성수지 생산설비 규모는 연산 317만 톤으로 이미 국내 수요를 100만 톤이나 넘어섰다. 더욱이 1994년까지 210만 톤 규모의 생산설비가 추가로 가동될 예정이어서 공급과잉 문제는 그야말로 심각한 지경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992∼1994년 사이에는 국제 석유화학시장의 불황으로 인해 판매가격까지 하락하면서 기업채산성은 더욱 더 악화되었다. 수입 나프타 가격은 날로 상승하는 반면 제품가격은 폭락하는 바람에 기업들의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이다. 그 와중에 일본 업체들은 우리나라를 상대로 덤핑공세를 펼쳐 국내 석유화학기업들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수요자인 플라스틱 가공업체들의 부도 행진으로 내수시장은 더욱 위축되었다. 또 자동차, 가전 등의 가공업체들이 재고누적으로 가동률 조정에 들어가면서 원료공급처인 석유화학업계의 판매경쟁은 한층 과열되었다. 수출에서도 1992년 7월 이후 중국, 인도네시아 등의 수요가 줄면서 수출가격이 급락하는 현상을 보였다.
공급과잉이 현실화되고 기업들의 채산성이 급격히 악화하자 업계는 비상상황이 되었다. 시장에서는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연일 치열한 경쟁이 펼쳐졌고, 가동을 중단하거나 감축운영하는 공장들이 속출했다. 럭키석유화학 나프타분해공장은 가동률이 65% 수준으로 떨어졌고, 삼성종합화학은 73% 수준에 머물렀다. 대림산업은 연산 35만 톤에 달하는 나프타분해공장의 가동을 중단하기도 했다.
결국 1991년 말부터 시장에서는 덤핑판매가 횡행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20~30% 수준에서 덤핑판매가 이루어졌으나 수출마저 감소세를 보이자 내수시장 확보를 위해 40%까지 가격을 할인하는 제살 깎아먹기 경쟁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 막강한 자금력을 가진 대기업들도 경쟁업체들을 따돌리기 위해 저가의 물량공세를 펼쳤다. 경쟁은 경쟁을 낳고 투매는 투매를 낳는 부작용으로 이어지며 시장은 순식간에 공황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무질서해졌다.
시장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대한유화의 경영상황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재무구조 개선을 위한 차입금도 더 이상 들여오기가 어려워졌다. 그룹사들처럼 상호지급보증을 할 계열회사도 존재하지 않아 오직 주거래은행의 협조와 지원에만 의지해야 하는 대한유화로서는 뾰족한 해법을 찾기가 어려웠다.
설상가상으로 회사가 곤경에 처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제2금융권으로부터 대출금 상환 압박이 거세졌다. 또 업계에서는 “대한유화가 회생 불가능한 상태여서 폐업하거나 자금력이 있는 다른 회사로 매각될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떠돌기도 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대한유화는 창립 이래 20여 년 동안 오로지 석유화학 하나의 업종에만 전념해 왔다. 그 사이에 우수한 전문인력을 양성하고, 뛰어난 기술력과 높은 생산성을 바탕으로 가격 경쟁력도 확보하여 탄탄한 성장기반을 구축해 왔다. 또 함께 성장한다는 신념으로 협력업체들과 건강한 동반자관계를 형성했고 거래기업들과도 두터운 신뢰를 쌓아 왔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일부 대기업들의 무분별한 사업 확장과 자금력 앞에서는 무력했다. 시장질서가 붕괴되고 생존을 위한 출혈경쟁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대한유화의 20년 성과도 속절없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이때부터 대한유화에게는 고통의 시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