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사
회사살리기운동과 법정관리체제 전환
인력구조조정 및 인사고과제 도입
대한유화는 1992년 들어 한 치 앞을 장담할 수 없는 위기상황에 직면했다. 적자가 누적되는 가운데 운영자금을 확보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시장에서는 원가를 밑돌 만큼 제품가격이 폭락해 판매를 통한 수익 창출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경영상태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되자, 대한유화는 자구책을 마련하기 위해 1992년 10월 말 한국생산성본부에 경영진단을 의뢰했다. 경영상황을 정확히 점검하여 문제점을 드러내고 그 해결책을 찾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1993년 3월 진단 결과가 나왔다. 생산직 직원을 포함해 170여 명의 잉여인력을 구조조정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전체 임직원 수가 1280명 수준이었는데, 그 절반인 650명 수준으로 인력을 줄일 수 있다는 말도 나왔다. 합리적인 인력운영을 위해 인사고과제도를 도입할 것을 권고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이에 대한유화는 대대적인 조직개편을 단행하여 조직을 일부 통폐합하고, 유사업무를 통합하거나 희망퇴직을 실시하는 방식으로 인력을 감축하기로 했다. 먼저 1993년 3월 26일 주주총회를 열고 상위직 임원 6명을 퇴임시켰다. 또 4월 2일에는 차·부장급 간부직원 5명을 명예퇴직 형태로 퇴직시키고, 생산직 직원에 대한 구조조정도 실시했다.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는 심정으로 조직축소와 인력감축을 단행한 대한유화는 경영체질을 보다 강화한다는 취지에서 한국생산성본부가 권고한 ‘인사고과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다. 인사고과제도란 직원들 간의 선의의 경쟁을 통해 조직의 효율성을 높이고 생산성 향상을 도모하기 위한 인사평가제도이다. 직원들이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분위기를 조성해서 생산성을 높이려는 제도인 것이다.
제도 도입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직원들의 반대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대한유화는 회사가 처한 위기를 극복하고 회사의 체질을 개선하여 향후의 성장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인사고과제도 도입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직원들에게 설득했다. 그리고 1995년 1월부터 전사에 이 제도를 도입했다.
처음으로 시행된 인사고과제도는 1년에 2회 실시되었다. 과장급 이상은 업적 위주로, 대리급 이하는 능력 위주로 평가했다. 평가항목을 세분화하여 최대한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하도록 했으며, 평가기준은 직급에 관계없이 5개 등급으로 나눠 평가하도록 했다.
인사고과제도는 기대 이상의 효과를 가져왔다. 직원들 스스로가 업무를 설계하고 수행하면서 능력과 업적을 관리하는 전향된 자세를 갖도록 한 것이다. 이는 곧바로 업무생산성의 향상으로 이어졌고, 넓게는 보다 효율적으로 일하는 문화를 조성하는 기반이 되었다.
노동조합의 ‘회사살리기 운동’
위기에 빠진 회사가 위기를 극복하고 원래의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전 임직원이 단합된 힘으로 함께 노력해야 한다. 이 같은 관점에서 대한유화는 회사의 경영현황을 직원들에게 투명하게 공개하고 협조를 당부하기로 했다.
먼저, 1993년 4월 1일 대한유화는 노동조합을 포함한 전 직원들을 대상으로 회사의 자산과 부채, 자본금, 생산량, 대내외 시장여건 등의 경영정보를 있는 그대로 공개했다. 그리고 회사가 정상화될 수 있도록 ‘회사살리기 운동’에 적극 동참해 줄 것을 간곡히 호소했다. 이 자리에서 이정호 회장은 경영난 타개에 앞장선다는 취지에서 급여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노동조합은 노조 확대 간부회의를 열고, 회사살리기 운동에 적극 동참하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이 결의를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조합 내에 ‘회사살리기 실무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직접 조합원들과의 대화에 나섰다.
노동조합은, “회사의 경영이 악화된 원인은 경영진의 부도덕이나 실수에 의한 것도 아니고 직원들의 불성실에서 기인한 것도 아니”라며, “경영정상화를 위해 노사가 합심한다 해도 대기업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려운 상황이므로 대대적인 자구노력에 모두가 적극 동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에 대해서도 공급과잉 등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정책을 펼쳐줄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노동조합은 이정호 회장과 두세 차례 면담을 갖고 회사의 회생을 위해 노사가 함께 노력하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4월 19일에는 대의원 찬반투표를 실시하여 37명 중 34명의 찬성으로 임금동결을 결의했다. 자발적인 임금동결은 울산지역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와 함께 노동조합은 서클지원금 유보, 안전화·작업복 등 회사 지급품의 사용기간 연장, 회사가 제공하던 토요일 점심식사와 생일케이크 지원 중단, 에너지 절약을 위해 전 조합원 통근버스 이용, 장갑·문구류 등 소모품 절약, 구매품과 자재에 대한 원가절감 운동 확대, 생산성향상 및 품질향상 운동 전개, 연대서명 등 10개 항의 실천방안을 마련했다.
그리고 이 실천방안에 대한 실행력을 높이기 위해 4월 22일 울산공장에서 울산공장과 온산공장의 직원 대부분이 모인 가운데 노동조합 주최로 ‘회사살리기 한마음 결의대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노동조합은 회사의 위기상황을 공유하고, “노동조합의 단결력과 투철한 사명의식을 바탕으로 회사경영의 정상화와 국가경제의 발전에 이바지하자”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한편, 같은 날 노동조합은 “삼가 대통령에게 호소합니다”라는 제목의 호소문을 작성해 각 일간지에 게재했다. 호소문에서 노동조합은 “1970년 공장 설립 이후 한눈팔지 않고 석유화학만을 고집해 온 전문업체가 대기업들의 과잉투자로 인해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다”고 호소했다. 더불어 정부가 석유화학업계의 어려움을 타개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도·조정 역할을 해줄 것과 석유화학산업을 산업합리화 업종으로 지정해 줄 것 등으로 요구했다.
노동조합은 “우리의 결의와 입장”이라는 제목의 광고도 별도로 제작하여 지역사회 언론 등에 게재했다. 이 광고에서 노동조합은 “①우리는 조건 없이 임금동결을 결의하였습니다, ②우리는 건실한 우량기업입니다, ③지역사회에 유포된 당사와 관련된 유언비어는 결코 사실이 아닙니다, ④회사 살리기에 노동조합이 앞장서겠습니다.”라고 밝히면서,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회사살리기에 성원을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회사 살리기에 노동조합이 앞장서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법정관리체제로의 전환
회사와 노동조합의 자구노력에도 불구하고 1993년 9월 무렵 대한유화의 유동성은 극도로 취약한 상태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부채가 문제였다. 부채 규모가 6,971억 원으로 자산보다 292억 원 적기는 하지만, 1년 이내에 변제해야 하는 유동부채가 4,580억 원이나 된 것이다. 반면에 유동자산은 1,025억 원에 불과해 자칫 부도에 직면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 되었다.
대한유화는 일시적인 자금난으로 쓰러지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회사였다. 창립 이래 우리나라 석유화학산업의 발전을 주도하며 풍부한 경험과 기술을 축적한 회사이기 때문이었다. 또 1991년 11월 나프타분해공장을 준공하여 수직계열화를 완성한 데다, 연간 생산능력이 62만 톤에 달해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매우 컸다. 매출액의 50%를 수출해 국가경제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도 대한유화의 강점이었다.
향후의 시장전망도 나쁘지 않았다. 1993년 이후에는 당분간 업계 전체적으로 공장 신·증설 계획이 없어 더 이상의 공급과잉이 발생할 여지가 없는 데다, 업계가 경영수지 악화를 해소하기 위해 가격구조 개선 및 생산량 조절에 들어가면서 점차 수익성이 개선되기 시작한 것이다. 주원료인 나프타의 국제가격이 하락하고, 국내는 물론 동남아시장에서 합성수지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도 긍정적이었다.
이 같은 이유에서 대한유화는 파산이나 청산 대신 회사정리를 취한다면 단기간에 부실 원인을 제거하고 부채도 단계적으로 상환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회사정리 절차에 들어가는 것이 최선이라 판단한 것이다. 이 같은 판단에 따라 대한유화는 1993년 9월 초 법원에 회사재산보전처분 및 회사정리절차 개시를 신청했다.
당시 주거래은행이자 담보권자인 한일은행과 보람은행도 대한유화의 정리절차 개시에 동의해 주었다. 특히 대한유화의 채무 가운데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한일은행은 대한유화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판단하고, 정리계획 수행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할 의사가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1993년 9월 8일 서울민사지방법원은 대한유화에 대해 회사재산 보전처분 결정을 내렸다. 기업회생을 도모할 수 있도록 잠정적으로 채무의 변제를 정지한다는 게 주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대한유화는 법정관리체제에서 기업회생을 위한 절차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때맞춰 대한유화의 주식 314만여 주를 소유하고 있던 일본의 마루베니도 대한유화의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1993년 11월 19일자로 소유주식 전부를 무상소각 처리했다. 또 대한유화의 주식 55%를 소유한 이정호 회장과 친인척들도 “소유주식의 2/3 이상의 무상소각을 감수하는 것은 물론, 회사에 담보로 제공한 개인재산에 대해 일체의 채권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 같은 자구책을 바탕으로 1994년 4월 6일 서울민사지방법원은 대한유화에 대해 회사정리절차 개시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서갑석이 관리인으로 선임되고, 대한유화는 공식적으로 법정관리체제로 들어가게 되었다. 위기 속에서 드디어 회생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